마리아는 로마의 한 병원에서 일하며 정신병원 수용소를 방문하는 일과가 있었다. 그곳에는 정박아들이 가족의 보호도 받지 못한채
기본적인 욕구만을 충족 받으며 동물과 다를 바 없이 생활하였고 이른 본 마리아는 무척 슬퍼하였다. 식사가 끝난 어느 날,
아이들은 책상 아래에 떨어진 빵 부스러기들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있는 모습을 본 간호원은 아이들이 게걸스럽고 더럽다고
비난하였지만, 마리아는 그 모습을 통해 아이들이 손을 사용하여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이 없기에 그런 것임을 생각하고 슬퍼하였다.
프랑스인인 세강과 이타르는 청각 장애아를 연구하며 “감각 교구”를 고안하여 그들을 도왔다. 마리아도 세강과 이타르의 “감각 교구” 가
청각 장애아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정박아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공부를 하였고 몇가지 감각 교구를 고안해냈다.
정박아들은 마리아가 만든 감각교구를 그들의 손가락으로 만지며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를 맡고 귀로 들음으로써 배우게 되었다.
이 배움은 간단했고 쉬웠고 단순했다. 아이들은 그들이 가진 감각으로 아주 쉽게 배워갔다. 아이들과 마리아는 행복했다. 그러던 중 마을
사람들은 ‘백치’로 소문이 났던 정박아들이 정상아들과 함께 시험을 볼 수 있는지를 궁금해 했고, 정박아들과 정상아들이 함께 시험을 본
결과 정박아들이 정상아들보다 더 잘 해내었다.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말했다. 더 나아가 마리아는 자신이 고안해낸 특수 감각교구를
아이들을 교육할 수 있는 교사를 양성하는 데에 힘 썼다. 마리아로 인하여 이탈이아의 정박아는 더 이상의 희망이 없는 백치가 아닌
그들도 학교에 갈 수 있고, 최고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1900년대 초기는 가난한 농부 또는 일자리를 찾아 로마로 나가는 사람들이 대다수였으며 대규모 아파트에 살았다. 대부분의 엄마들도
공장에 나가서 일을 하였기에 어린 아이들은 일을 하거나 학교을 갈 수 없어 집에 홀로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중에서 산 로렌초는
로마에서 가장 환경이 나쁜 곳 중의 하나였다. 그곳의 한 아파트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부모님이 공장을 가서 홀로 남겨진
아이들은 무리를 지어다니며 거친 행동들을 하였다. 이를 위험하게 생각한 아파트 주인은 마리아를 찾아가 자신의 아파트 한 켠에 이러한
아이들을 모아 돌보아 줄 수 있는지를 상의했고, 마리아는 정상아들에게 교육할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다.
마리아는 목수를 고용해 아이들의 체격에 맞는 책상과 의자를 만들었고 깨끗하고 햇볕이 잘 들게끔 환경을 구성하였다. 1907년 1월
6일 마리아는 어린이집 문을 열고 어린이들을 초대했다. 산 로렌초의 거친 아이들은 일찍이 이렇게 깨끗하고 본인들의 체구에 맞는
가구를 접해본 경험이 없었기에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몰라 여전히 거칠게 행동하고 시끄러웠다.
마리아는 정박아를 위해 고안해낸 감각 교구를 가지고 왔고, 아이들은 그 교구들을 가지고 즐겁게 놀았고 또 빠르게 습득했다. 마리아는
밤새도록 교구를 만들었다. 분홍탑, 빨간 막대, 물레상자, 꼭지원기둥 외 셈하기, 읽기, 쓰기, 자신과 어린이집을 돌보는 일을 배웠다.
아이들과 마리아는 아주 즐거웠다. 얼마 후 사람들은 산 로렌초의 거친 아이들에 대한 소문을 듣기 시작하였고, 마을 사람들이며 정부
기관의 사람들은 어린이집의 아이들을 보고도 믿을 수 없어 했다. 거칠고 지저분했던 아이들은 스스로를 돌볼 줄 알았으며 읽기와 쓰기,
셈 등을 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마리아를 존경하기 시작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마리아의 까사 데 밤비니 어린이집을 보러 왔고, 마리아의 학교와 독특한 교육법에 대해서 배우기를 원했다.
사람들은 이 교육법을 “몬테소리 방법”이라고 불렀다. 그뒤 마리아는 20년 동안 마리아는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며 거의 모든 지역에
몬테소리 학교를 설립했고 몬테소리 교사 양성에 힘 썼다.
1920년 대가 시작되었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의 모든 학교는 Dr.마리아몬테소리의 교육법을 따라야한다고 언명하였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1934년 자신의 학교의 어린이들을 병사로 바꾸려고 하는 무솔리니의 계획을 따르기를 거부하였고 화가 난
무솔리니는 이를 계기로 Dr.마리아몬테소리의 학교를 폐쇄하기에 이른다. 무솔리니는 베를린의 광장에서 Dr.마리아몬테소리가 쓴
책들과 초상화까지 불 태웠다.
마리아는 조국을 떠나는 것이 슬펐지만 이것보다 자신의 활동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 마리아는 스페인으로 가서 자신의 학교에서
어린이들이 세계와 자신들을 서로 사랑하는 법과 평화를 가르쳤다. 평화를 아는 어린이들이 어른으로 자란다면 더이상의 전쟁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스페인에서 영국, 영국에서 네덜란드. 마리아는 자신이 가는 곳마다 학교를 설립하고 교사를 양성하며 책을 썼다.
전쟁은 더욱 심해져 갔다. 마리아는 활동 중단의 위기를 느껴야만 했다.
마리아는 조국을 떠나는 것이 슬펐지만 이것보다 자신의 활동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 마리아는 스페인으로 가서 자신의 학교에서
어린이들이 세계와 자신들을 서로 사랑하는 법과 평화를 가르쳤다. 평화를 아는 어린이들이 어른으로 자란다면 더이상의 전쟁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스페인에서 영국, 영국에서 네덜란드. 마리아는 자신이 가는 곳마다 학교를 설립하고 교사를 양성하며 책을 썼다.
전쟁은 더욱 심해져 갔다. 마리아는 활동 중단의 위기를 느껴야만 했다.
유럽 전쟁에 휩싸이지 않은 인도의 초청으로 마리아는 인도에서 안심하고 교사들을 교육하며 학교 설립과 교육에 힘 쓸 수 있었다.
인도의 풍습은 유럽과 아주 달랐다. 인도 사람들은 샌들이나 맨말로 지냈기에 어린이들에게 뜨개질을 하거나 구두 끈을 매는 법을
가르칠 필요가 없었다. 대신 사리를 걸치는 방법, 꽃다발 묶기, 앞이마에 백단액 찍기 등을 가르쳤다. 풍습은 달랐지만 마리아는
인도에서의 생활을 사랑하게 되었고 인도인들도 마리아의 여성다운 온화함과 신념이 확실한 마리아를 사랑하였다.
마리아는 인도에서 7년 동안 살았으며 70대가 되었다. Dr.마리아몬테소리는 이곳에서 Cosmic Educstion를 확립한다.
0~6세는 개별 학습과 자기 개발 학습에 초첨이 맞춰져 있다면 6세 이상은 중급 과정으로 반 전체의 성장에 영향을 받는, 다른
급우들과 어울리는 식의 교육이 이뤄진다. 그 이유는 어린이들의 평화를 위한 교육이 지구의 평화를 위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린이들은 살아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고 받아들이고, 또 사람들은 서로 돕고 사는 사회에 산다는 것을 배워야
했다. 어린이들이 이러한 것들을 이해하게 될 때 평화와 사랑을 아는 존재로 성장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고 이러한 교육이 지구의
평화뿐만이 아닌 더 나아가 우주의 평화를 가져온다고 주장하였다.